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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도 1세 (나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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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디난도 1세는 1424년 발렌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사생아였으나 아버지 알폰소 5세에 의해 나폴리로 불려 칼라브리아 공작을 거쳐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1458년 즉위 후, 비아나 공작 카를로스의 왕위 계승 시도, 교황 칼릭스토 3세의 견제, 남작들의 반란 등 여러 위협에 직면했으나 밀라노 공국 등의 지원을 받아 통치를 유지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평화를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오스만 제국의 침입에 맞서 오트란토를 탈환하는 등 뛰어난 정치적,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르네상스 문화를 장려하고 건축, 예술, 학문을 후원했으며, 1494년 사망할 때까지 나폴리 왕국을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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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도 1세 (나폴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페르디난도 1세의 현대적인 흉상
페르디난도 1세의 현대적인 흉상
칭호나폴리 국왕
재위 기간1458년 6월 27일 – 1494년 1월 25일
대관식1458년 8월 16일 바를레타 대성당, 아풀리아
선임자알폰소 1세
후임자알폰소 2세
왕가트라스타마라
아버지알폰소 5세
어머니지랄도나 카를리노
출생일1423년 6월 2일
출생지발렌시아, 아라곤 왕국
사망일1494년 1월 25일 (향년 70세)
사망지나폴리, 나폴리 왕국
매장지산 도메니코 마조레, 나폴리
혼인과 자녀
배우자이사벨라 디 타란토
추아나 다라곤
자녀알폰소 2세, 나폴리 국왕
엘레오노라, 바리 및 페라라 공작부인
페데리코, 나폴리 국왕
추기경 조반니
베아트리체, 헝가리 및 보헤미아 왕비
조반나, 나폴리 왕비
페르디난도, 몬탈토 공작 (사생아)

2. 생애

페르디난도 1세는 1458년 아버지 알폰소 5세의 뒤를 이어 35세의 나이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폴리와 예루살렘의 군주로서 페르디난도 1세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즉위 초 교황 갈리스토 3세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며 나폴리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선언하였다.[96] 다행히 갈리스토 3세가 사망하고, 신임 교황 비오 2세는 그해 페르디난도의 지위를 인정하였다.[96]

1459년, 페르디난도의 통치는 남작들의 반란으로 위협받았다. 반란의 주동자는 타란토 후작이자 페르디난도의 아내 이사벨라 디 타란토의 삼촌인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였다. 반란자들은 앙주 가문의 르네 당주의 아들 장 2세 드 로렌에게 왕위를 제안했고, 장 2세는 제노바 공화국의 도움으로 함대를 빌려 상륙, 노체라를 포함한 일부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베수비오 산 남쪽 사르노 전투에서 장 2세에게 패배하고 20명의 경호원과 함께 겨우 탈출하였다. 교황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는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전투가 끝난 후였고, 그들도 산파브리아노에서 장 2세의 동맹에게 괴멸되었다.[96]

캄파니아의 대다수 요새들이 항복했음에도, 장 2세는 나폴리로 진군하지 않았고, 페르디난도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는 나폴리를 지키며 서서히 입지를 회복하였다. 이사벨라는 오르시니 가문에게 장 2세를 돕는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를 설득하도록 했다. 교황령, 밀라노 공국, 스칸데르베그는 군대를 보내 1462년 8월 18일 트로이아에서 장의 군대를 격퇴했다. 장의 함대는 1465년 7월 페르디난도와 아라곤의 국왕 후안 2세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다.[97] 1464년에 페르디난도는 일부 남작들의 반발이 남아있음에도, 그의 왕국에 권위를 다시 세웠다.

페르디난도 1세가 새겨진 주화


1463년, 페르디난도의 아내는 삼촌 조반니 안토니오 델 발초 오르시니의 타란토, 레체와 아풀리아의 영지를 상속받아 페르디난도의 권력과 지위가 강화되었다.

1478년, 페르디난도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항하여 교황 식스토 4세와 동맹을 맺었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가 홀로 나폴리로 가 페르디난도와 평화 협상을 성공시켰다.

1480년, 메흐메트 2세 휘하의 오스만 튀르크군이 오트란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지만,[98] 다음 해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알폰소 왕자가 탈환했다. 1482년, 페르디난도는 교황령에 있던 전통적 성기사의 위치를 포기하고, 페라라, 밀라노와 함께 식스토 4세와 그의 동맹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1485년, 페르디난도의 억압적인 정부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는 귀족들의 반란(남작들의 음모)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고, 페르디난도는 많은 귀족들을 사면했지만, 그 뒤에 체포하여 처형했다.

1493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정복을 위한 이탈리아 침입 준비를 하자, 페르디난도는 이탈리아 대공들에게 경고했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 루도비코 스포르차와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페르디난도 1세는 1494년 1월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알폰소 2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2. 1. 어린 시절과 상속

페르디난도는 아라곤의 알폰소 5세와 나폴리 귀족 출신인 게랄도나 카를리노[11]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알폰소 5세는 1442년 나폴리 왕국을 정복한 후, 후계자로서 입지가 약한 페르디난도를 위해 나폴리 왕국 최대 제후인 타란토 공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 델 발초의 조카이자 상속녀인 이사벨 드 클레르몽과 결혼시켜 아들의 지위를 강화했다.

1444년, 페르디난도는 코페르티노 백작 트리스탕 드 클레르몽과 타란토조반니 안토니오 델 발초 오르시니의 질녀이자 계승자인 카테리나 델 발초 오르시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이사벨라 디 타란토와 혼인했다. 이사벨라는 1406년에서 1414년 사이 나폴리 여왕이었던 마리 덩기엉의 손녀이자 남부 이탈리아 상당한 영지의 계승자였다.

1458년, 아버지 알폰소 5세의 뜻에 따라 35세의 나이로 나폴리와 예루살렘의 군주 페르디난도 1세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며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갈리스토 3세가 사망(1458년 8월)하고, 신임 교황 비오 2세가 페르디난도의 직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1463년, 페르디난도의 아내는 삼촌 조반니 안토니오 델 발초 오르시니의 계승자로서 타란토, 레체와 아풀리아의 영지를 계승했다. 이사벨라는 또한 예루살렘 왕국의 브리엔 소유권자였다.

2. 1. 1. 유년기

페르디난도 1세는 1424년 6월 2일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나폴리 출신의 게랄도나 카를리노였다.[11] 아버지 알폰소 5세는 사생아 아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 그를 나폴리로 불렀다. 1438년 7월 26일, 페란테는 어린 카탈루냐 귀족들의 수행원과 함께 바르셀로나를 출발하여 이탈리아로 향했다. 8월 19일 가에타에 상륙하여 아버지와 재회했다.

알폰소는 아들의 지성과 용기를 높이 평가했고, 둘 사이에는 강한 정서적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1438년 9월 9일, 알폰소는 마달로니 벌판에서 페란테를 기사로 임명했다.

나폴리에서 페란테는 발라, 파노르미타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법학은 튜터 파리 드 푸테오가 가르쳤다.[14] 알폰소가 왕국의 ''사크로 레지오 콘실리오''를 설립했을 때 의장직을 맡았다.[12]

1439년 4월, 삼촌 페테르가 사망한 후, 페란테는 왕국의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440년 2월 17일, 알폰소는 페란테를 적자로 인정하고 나폴리 왕위 후계자로 선언했다. 1441년 1월, 베네벤토에서 소환된 왕국 남작들의 의회 승인을 얻었다. 의회는 페란테를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고, 알폰소는 이를 수락했다.[14]

1443년 3월 3일, 알폰소는 페란테에게 칼과 깃발을 주고 공작의 원을 머리에 씌우며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칭하라고 명령했다.[14]

마르코 카르디스코의 동방 박사 경배에서 동방 박사 중 한 명으로 묘사된 나폴리의 돈 페란테, 카스텔 누오보 시민 박물관, 나폴리


페란테의 계승권은 1443년 7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교황 칙서로 공식화되었고, 1451년 교황 니콜라오 5세에 의해 확인되었다.[13] 1444년, 타란토의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1452년 6월, 알폰소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청으로 피렌체에 전쟁을 선포하고, 페란테에게 기병 6천 명과 보병 2만 명을 이끌게 했다. 페란테는 아브루초를 거쳐 산 갈가노 수도원에 머물렀다. 피렌체프랑스샤를 7세에게 르네 왕에게 나폴리 왕국 재정복을 촉구하도록 했다.

말라리아에 취약한 투물로에서 페란테 군대에 역병이 퍼져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등이 병에 걸렸다. 페란테는 군대를 피틸리아노로 옮겼다.[14]

9월 1일, 페란테는 포이아노 점령 소식을 들었다. 겨울이 오자 토스카나에서의 전쟁은 끝났다.[14] 알폰소는 평화 협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 시에나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1454년 4월 9일, 베네치아와 밀라노 공작 사이에 평화가 선언되었다.[14]

알폰소는 페란테에게 토스카나를 떠나 아브루초로 가라고 명령했고, 왕국 경계에서 지휘관들을 해임했다.[14]

1454년 8월 28일, 페란테는 나폴리에 입성하여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14]

1455년 2월 15일, 도메니코 카프라니카 추기경은 교황의 요청으로 알폰소와 함께 동맹을 협상, 체결했다. 알폰소는 밀라노 공작 및 피렌체와 평화, 우정을 약속했다.[14]

2. 1. 2. 청소년기

페르디난도 1세는 1424년 6월 2일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알폰소 5세는 사생아 아들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1438년 그를 나폴리로 불렀다.[11] 알폰소 5세의 요청에 따라 페르디난도는 어린 카탈루냐 귀족들의 수행원과 함께 바르셀로나를 출발하여 이탈리아로 향했으며, 1438년 8월 19일 가에타에 상륙하여 아버지와 재회했다.

알폰소 5세는 아들의 지성과 용기를 높이 평가했고, 둘 사이에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1438년 9월 9일 마달로니 벌판에서 페르디난도를 기사로 임명했다. 나폴리에서 페르디난도는 발라, 파노르미타 등 훌륭한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법학을 가르친 튜터 파리 드 푸테오도 있었다.[14] 1439년 4월, 삼촌 페테르가 사망한 후, 페르디난도는 왕국의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440년 2월 17일, 알폰소 5세는 페르디난도를 적자로 인정하고 나폴리 왕위 후계자로 선언했다. 1441년 1월 베네벤토에서 소환된 왕국 남작들의 의회는 이를 승인했다. 의회는 페르디난도를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고, 알폰소 5세는 이를 수락했다.[14] 1443년 3월 3일, 산 리고로 수녀원에서 페르디난도는 공식적으로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임명되었다.[14]

페르디난도의 계승권은 1443년 7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교황 칙서로 공식화되었고, 1451년 교황 니콜라오 5세에 의해 재확인되었다.[13] 1444년, 페르디난도는 타란토의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1452년 6월, 알폰소 5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청으로 피렌체에 전쟁을 선포하고, 아들 페르디난도를 파견했다. 페르디난도는 아브루초를 거쳐 산 갈가노 수도원에 머물렀다. 피렌체인들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말라리아가 퍼지면서 페르디난도는 군대를 피틸리아노로 옮겨야 했다.[14] 9월 1일, 포이아노 점령 소식을 들었고, 겨울이 오면서 토스카나에서의 전쟁은 끝났다.[14] 알폰소 5세는 평화 협상을 통해 베네치아 공화국, 시에나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알폰소 5세는 페르디난도에게 토스카나를 떠나 아브루초로 가라고 명령했고, 1454년 8월 28일 페르디난도는 나폴리에 입성했다.[14] 1455년 2월 15일, 교황의 요청으로 도메니코 카프라니카 추기경이 나폴리에 와서 동맹을 협상했다. 알폰소 5세는 밀라노 공작 및 피렌체인들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14] 페르디난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458년 35세의 나이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2. 2. 즉위와 통치

페르디난도 1세는 1458년, 아버지 알폰소 5세의 뒤를 이어 35세의 나이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폴리와 예루살렘의 군주로서 페르디난도 1세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즉위 초 교황 갈리스토 3세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며 나폴리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선언하였다.[96] 다행히 갈리스토 3세가 사망하고, 신임 교황 비오 2세는 그해 페르디난도의 지위를 인정하였다.[96]

1459년, 페르디난도의 통치는 남작들의 반란으로 위협받았다. 반란의 주동자는 타란토 후작이자 페르디난도의 아내 이사벨라 디 타란토의 삼촌인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였다. 반란자들은 앙주 가문의 르네 당주의 아들 장 2세 드 로렌에게 왕위를 제안했고, 장 2세 드 로렌제노바 공화국의 도움으로 함대를 빌려 상륙, 노체라를 포함한 일부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베수비오 산 남쪽 사르노 전투에서 장 2세 드 로렌에게 패배하고 20명의 경호원과 함께 겨우 탈출하였다. 교황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는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전투가 끝난 후였고, 그들도 산파브리아노에서 장 2세 드 로렌의 동맹에게 괴멸되었다.[96]

캄파니아의 대다수 요새들이 항복했음에도, 장 2세 드 로렌나폴리로 진군하지 않았고, 페르디난도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 디 타란토는 나폴리를 지키며 서서히 입지를 회복하였다. 이사벨라 디 타란토는 오르시니 가문에게 장 2세 드 로렌를 돕는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를 설득하도록 했다. 교황령, 밀라노 공국, 스칸데르베그는 군대를 보내 1462년 8월 18일 트로이아에서 의 군대를 격퇴했다. 의 함대는 1465년 7월 페르디난도와 아라곤의 국왕 후안 2세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다.[97] 1464년에 페르디난도는 일부 남작들의 반발이 남아있음에도, 그의 왕국에 권위를 다시 세웠다.

1463년, 페르디난도의 아내는 삼촌 조반니 안토니오 델 발초 오르시니의 타란토, 레체와 아풀리아의 영지를 상속받아 페르디난도의 권력과 지위가 강화되었다.

1478년, 페르디난도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항하여 교황 식스토 4세와 동맹을 맺었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가 홀로 나폴리로 가 페르디난도와 평화 협상을 성공시켰다.

1480년, 메흐메트 2세 휘하의 오스만 튀르크군이 오트란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지만,[98] 다음 해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알폰소 왕자가 탈환했다. 1482년, 페르디난도는 교황령에 있던 전통적 성기사의 위치를 포기하고, 페라라, 밀라노와 함께 식스토 4세와 그의 동맹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1485년, 페르디난도의 억압적인 정부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는 귀족들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고, 페르디난도는 많은 귀족들을 사면했지만, 그 뒤에 체포하여 처형했다.

1493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정복을 위한 이탈리아 침입 준비를 하자, 페르디난도는 이탈리아 대공들에게 경고했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 루도비코 스포르차와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2. 2. 1. 정적 숙청

1485년, 페르디난도 1세의 억압적인 정부에 대항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는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에는 프란체스코 코폴라, 살레르노의 안토넬로 산세베리노 등이 연루되었다.[14][47] 코폴라와 안토넬로 페트루치는 카스텔 누오보에서 열린 결혼식 중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5][55]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페르디난도 1세의 사면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귀족들이 그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4][57]

페르디난도 1세는 아들 알폰소 공작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고령과 새 신부의 영향으로 정부의 거의 모든 권한을 알폰소에게 넘겼다. 알폰소는 귀족들을 멸시하며 억압하는 것이 백성을 돕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알폰소의 태도와 페르디난도 1세의 중앙 집권적 통치는 1485년에 두 번째 귀족 반란을 야기했다. 귀족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14][47]

이 반란의 주동자는 사르노 백작 프란체스코 코폴라와 왕의 비서 안토넬로 페트루치였다. 이들은 살레르노 공작 안토넬로 산세베리노, 알타무라 공작 피로 델 발조, 비스냐노 공작 등 여러 귀족들과 함께 멜피에 모여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교황은 이를 수락했다.[14][48]

페르디난도 1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비스냐노 공작과 평화 조약을 맺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아무것도 줄 의도가 없었다. 나폴리의 페데리코를 살레르노로 보내 안전을 도모하게 했지만, 살레르노 공작은 페데리코에게 나폴리 왕국을 제안하며 알폰소를 쫓아낼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페데리코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14][49][50]

이에 분노한 페르디난도 1세는 교황에게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하고, 칼라브리아 공작 알폰소를 대규모 군대와 함께 왕국의 국경으로 보냈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베네치아는 중립을 지켰다. 알폰소는 교황령을 침공하여 로마를 포위했고, 페르디난도 1세는 속임수로 귀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14][52][53]

결국 교황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귀족들이 왕과 합의하도록 설득했다. 1486년 8월 12일, 밀라노 대주교 조반니 아르침볼디 등이 참여한 가운데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조건 중 하나는 왕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인정하고, 통상적인 수입과 치네아를 지불하며, 귀족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었다.[14][54]

''반역 귀족에 대항하여 봉기하라는 권고'', 1486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평화 조약 이후 페르디난도 1세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그의 요청을 모두 만족시켰다.[14][56]

그러나 남작들은 알폰소의 잔혹함과 페르디난도 1세의 불신을 알고 고통받았다. 페르디난도 1세와 알폰소는 반역자 코폴라와 페트루치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사르노 백작 아들과 국왕 조카딸의 결혼 축하 행사 때, 누오보 성에서 이들을 체포하고 고문했다.[25][55] 페르디난도 1세는 또한 프란체스코 코폴라, 페트루치 등 여러 귀족들을 투옥하고 참수형에 처했다. 그들의 재산은 국고에 귀속되었다.[14][57]

카스텔 누오보의 바론 홀, 남작 음모의 종결이 일어난 장소


이후 페르디난도 1세는 알타무라 공, 비시냐노 공, 멜피 공작 등 많은 귀족들을 투옥하고, 칼라브리아 공작의 자극으로 거의 모두 몰래 죽게 했다. 그러나 세상이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 오랫동안 생필품을 보냈다.[14][57]

이 사건 이후, 각국 군주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알폰소와 페르디난도 1세는 자신들을 변호했지만 소용없었다. 교황은 샤를 8세에게 왕국 침략을 촉구했지만, 페르디난도 1세는 새로운 조약으로 위협을 피했다.[25][58]

2. 2. 2. 영토 확장

페르디난도는 아버지 알폰소 5세의 뜻에 따라 1458년에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고 선언하고 나폴리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삼으려 했다. 갈리스토 3세가 사망한 후, 신임 교황 비오 2세는 페르디난도의 지위를 인정했다.[96]

1459년, 페르디난도의 통치는 남작들의 반란으로 위협받았다. 반란의 주동자는 페르디난도의 아내의 삼촌인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였다. 반란자들은 르네의 아들 장 2세 드 로렌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장 2세는 제노바의 도움을 받아 상륙하여 일부 도시들을 점령했다.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사르노 전투에서 장 2세에게 패배하고 20명의 경호원과 함께 겨우 탈출했다. 교황밀라노 공작은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들은 장 2세의 동맹에게 격파되었다.[96]

장 2세는 나폴리로 즉시 진군하지 않았고, 페르디난도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는 나폴리를 지키며 입지를 회복했다. 알바니아의 군주 스칸데르베그의 도움으로 1462년 8월 18일 트로이아에서 장의 군대를 격파했다. 장의 함대는 1465년 7월 페르디난도와 아라곤의 국왕 후안 2세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다.[97] 1464년에 페르디난도는 왕국의 권위를 다시 세웠다.

1463년, 페르디난도의 아내는 삼촌 조반니 안토니오 델 발초 오르시니의 타란토, 레체와 아풀리아의 영지를 상속받아 페르디난도의 권력과 지위가 강화되었다.

1480년에 오스만 제국군이 오트란토를 점령했지만,[98] 다음 해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알폰소 왕자가 탈환했다. 1482년, 그는 페라라밀라노와 함께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페라라 전쟁)

1485년, 페르디난도의 억압적인 정부는 귀족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았다. 반란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많은 귀족들이 페르디난도에게 사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2. 2. 3. 오스만 제국의 침입

1480년 메흐메트 2세 휘하의 오스만 튀르크군이 오트란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지만,[98] 다음 해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인 칼라브리아 공작 알폰소가 탈환했다.

2. 2. 4. 남작들의 음모 진압

페르디난도는 아버지 알폰소 5세의 뜻에 따라 1458년에 왕위를 계승했지만,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며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선언했다.[96] 그러나 교황 비오 2세는 페르디난도의 지위를 인정하였다.[96]

1459년, 페르디난도의 통치는 남작들의 반란으로 위협받았다. 반란의 주동자는 페르디난도의 아내의 삼촌인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였다.[96] 반란자들은 장 2세 드 로렌에게 왕위를 제안했고,[96] 장 2세는 함대를 이끌고 상륙하여 일부 도시들을 점령했다.[96]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사르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겨우 탈출했다.[96] 교황 비오 2세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는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들 역시 패배했다.[96]

장 2세는 나폴리로 진군하지 않았고, 페르디난도는 스칸데르베그의 도움을 받아 1462년 8월 18일 트로이아에서 장의 군대를 격파했다.[97] 장의 함대는 1465년 7월 페르디난도와 아라곤의 국왕 후안 2세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다.[97] 1464년에 페르디난도는 왕국의 권위를 다시 세웠다.[97]

1485년에 페르디난도의 억압적인 정부는 귀족 반란을 일으켰다.[97] 이 반란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는 프란체스코 코폴라(Francesco Coppola), 안토넬로 산세베리노 등이 연루되었다.[97] 코폴라와 안토넬로 페트루치는 카스텔 누오보에서 열린 결혼식 중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97] 페르디난도는 많은 귀족을 사면했지만, 그 뒤에 체포하여 처형했다.[97]

2. 2. 5. 외교 관계 강화

페르디난도는 1458년, 35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교황 갈리스토 3세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며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선언하였다. 갈리스토 3세가 사망하고, 신임 교황 비오 2세는 그해 페르디난도의 지위를 인정하였다.[96]

1459년, 페르디난도의 통치는 남작들의 반란으로 위협받았다. 반란의 주동자는 타란토 후작이자 페르디난도의 아내의 삼촌인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였다. 반란자들은 르네 당주의 아들 장 2세 드 로렌에게 왕위 계승을 제안했다. 장 2세 드 로렌제노바의 도움으로 함대를 빌려 상륙, 노체라를 포함한 일부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사르노 전투에서 장 2세 드 로렌에게 패배하였다. 페르디난도는 20명의 경호원과 함께 겨우 탈출하였다. 교황밀라노 공작은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전투가 끝난 후였고, 그들도 산파브리아노에서 장 2세 드 로렌의 동맹에게 괴멸되었다.[96]

캄파니아의 대다수 요새들이 항복했음에도, 장 2세 드 로렌나폴리로 진군하지 않았고 페르디난도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는 나폴리를 지키며 서서히 입지를 회복하였다. 이사벨라는 오르시니 가문에게 장 2세 드 로렌를 돕는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를 설득하도록 했다. 교황령, 밀라노, 스칸데르베그는 군대를 보내 1462년 8월 18일 트로이아에서 의 군대를 격퇴했다. 의 함대는 1465년 7월 페르디난도와 아라곤의 국왕 후안 2세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다.[97] 1464년, 페르디난도는 왕국 내 권위를 다시 세웠다.

1478년, 페르디난도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항하여 교황 식스토 4세와 동맹을 맺었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가 홀로 나폴리로 가 페르디난도와 평화 협상을 성공시켰다.

1480년, 메흐메트 2세 휘하의 오스만 튀르크군이 오트란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지만,[98] 다음 해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알폰소 왕자가 탈환했다. 1482년, 페르디난도는 교황령에 있던 전통적 성기사의 위치를 포기하고, 페라라, 밀라노와 함께 식스토 4세와 그의 동맹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1485년, 페르디난도의 억압적인 정부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는 귀족 반란을 일으켰다. 프란체스코 코폴라와 안토넬로 페트루치는 카스텔 누오보에서 열린 결혼식 중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고, 페르디난도는 많은 귀족들을 사면했지만, 그 뒤에 체포하여 처형했다.

1493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정복을 위한 이탈리아 침입 준비를 하자, 페르디난도는 이탈리아 대공들에게 경고했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 루도비코 스포르차와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2. 3. 죽음

1494년 1월 25일, 페르디난도 1세는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알폰소 2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2006년 페르디난도 1세의 미라화된 시신을 조사한 결과, 그의 사망 원인은 대장암으로 밝혀졌다. 시신에서 발견된 탄소 13과 질소 15는 그가 역사적 기록대로 육류를 많이 섭취했음을 보여준다.[99]

페란테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


1493년까지 왕국이탈리아에서 신중함으로 평화를 유지했던 페르디난도 1세는 프랑스 왕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왕국을 강화하고 강력한 적에 저항하기 위해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가래열병으로 14일간 병을 앓았는데, 이는 나이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 컸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건강과 정신적 명료함을 유지했다. 그의 튼튼하고 근육질의 몸은 노년에 쇠약해졌고, 젊은 시절 짧게 자른 짙은 흑발은 길고 하얗게 변했지만, 심각한 질병은 거의 없었다.[62]

죽기 직전, 그는 자신의 시간이 정말로 왔다고 믿지 않고 턱과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러나 갑자기 정신을 잃고 떨면서 곁에 있던 자녀와 손자들에게 "내 아이들아, 축복을 받아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Deus, propitius esto mihi peccatori|신이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소서la"라고 말하고 즉시 사망했다.[14][63] 그의 사망 원인은 2006년 그의 미라를 검사한 결과 대장암(KRas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있는 점액성 선암종)으로 밝혀졌다. 그의 유해는 상당한 육류 소비에 대한 역사적 보고와 일치하는 탄소 13과 질소 15의 수치를 나타낸다.[64] 이 군주의 죽음에 앞서 거대한 지진이 발생하여 나폴리, 카푸아, 가에타, 아베르사에서 많은 건물들이 붕괴되었다. 그가 묻힌 날, 나폴리 조폐창이 크게 무너졌다고도 한다.

알폰소의 명령으로 거행된 페르디난도 1세의 장례식은 성대했고, 도시의 남작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에게 극진한 예우를 다했다. 두 번의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는데, 하나는 군대가 참석한 가운데 카스텔 누오보에서, 다른 하나는 산 도메니코 마조레 성당에서 열렸다.[12]

그의 방부 처리된 시신은 금색 브로케이드로 덮인 관에 안치되어 산 도메니코 마조레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그의 무덤은 대성당의 성물실에서 볼 수 있다.[14] 그의 심장은 작은 금색 단지에 담겨 "Fernandus senior, qui condidit aurea saecla|황금 시대를 연 페르디난도 원로la. Hic felix Italum vivit in virum hoursla"라는 구절이 새겨졌다.[12]

그의 죽음은 후손과 왕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 불행하고 치명적인 재앙을 가져왔다.[14][63]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알폰소 2세 (나폴리)가 왕위에 올랐고, 그는 곧 자신의 아들 페란디노를 위해 왕위를 포기했는데, 이는 1494년에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침략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3. 페르디난도의 명성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은 페르디난도 1세에 대해 "뛰어난 용기와 정치 능력은 있었지만, 그의 정부 체계는 잔인하고 형편없었다. 재정 관리력은 강압적이고 부정한 독점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적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었다."라고 평가했다.[100]

페르디난도 1세는 자신의 왕국이 가진 중요성 때문에 많은 적을 두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위협이 된다면 무자비하게 다루었으며, 심지어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상대로 음모를 계획하기도 하였다.[100]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페르디난도 1세의 기분에 대해 "사냥과 재산 탕진 외에 두 가지 즐거움이 더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적들을 가까이 두고 싶어했는데, 살아있는 경우에는 견고한 감옥에, 죽은 경우에는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옷을 입혀 전시했다."라고 묘사했다.[95] 누구도 그의 이러한 취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기에, 페르디난도 1세는 손님들에게 자신의 시체 전시실을 보여주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4. 결혼과 자녀

또는 11월 16일1508년 9월 23일헝가리 왕 마차시 1세, 이후 울라슬로 2세와 결혼프란체스코1461년 12월 16일1486년 10월 26일산탄젤로 공작, 비스첼리에 후작



이름출생사망비고
조반나1478년1518년 8월 27일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2세 (조카)와 결혼
카를로1480년1486년장티푸스로 사망



페르디난도 1세는 여러 첩과의 사이에서 많은 서자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마리아1440년1460년아말피 공작 (교황 비오 2세의 조카)와 결혼
조반나1445년1501년아르체와 소라 공작 레오나르도 델라 로베레 (식스토 4세의 조카)와 결혼
일라리아조반니 델 테베레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와 결혼
엔리코1478년겔라체 후작


이름출생사망비고
마리아1451년


이름출생사망비고
체사레산타아가타 후작
알폰소1460년1510년키에자 주교, 후 키프로스 여왕 샤를로트의 양자, 키프로스 왕 자크 2세의 사생녀와 결혼, 갈릴리 공작을 자칭


이름출생사망비고
마리아 체칠리아브라차노 영주 잔 조르다노 오르시니 (후처는 펠리체 델라 로베레)와 결혼
루크레치아폰디 백작 오노라토 3세 카에타니 (전처는 산차 다라곤)와 결혼


이름출생사망비고
페르디난도1542년몬탈토 공작, 생모는 디아나 과르다토라는 설도 있음


5. 문화와 예술

페르디난도 1세는 학문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나폴리 왕국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1470년에는 브뤼셀의 아르놀드, 식스투스 리싱거, 요도코 하벤슈타인을 고용하여 이탈리아에 인쇄기를 처음으로 도입하도록 하였다.[14] 나폴리에서는 라틴 고전, 법전 주석, 의학 서적, 철학 강의, 왕국 헌법에 관한 저서, 어부들과 이탈리아 영웅들의 시 등 다양한 책들이 인쇄되었다.[12] 특히 그의 절친한 친구인 피에트로 수몬테가 인쇄한 사나자로의 아르카디아가 유명하다.[14][39] 1478년 리싱거가 로마로 돌아간 후에는 프란체스코 델 투포가 인쇄소 감독을 맡아 15세기 나폴리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인쇄했다.[40]

페르디난도 1세는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간청과 프란치스코의 청렴함에 대한 명성을 듣고 그를 파올라에서 나폴리로 초청했다. 1481년 나폴리에 도착한 프란치스코는 왕으로부터 큰 존경과 예우를 받았다.[41] 왕은 프란치스코에게 미니미 수도원을 나폴리에 건설하도록 제안하고 금화가 가득한 쟁반을 제공했지만, 성인은 이를 거절하고 동전 하나를 부러뜨려 피를 흘리게 했다. 이 피는 권력자에게 고통받는 백성들의 피를 상징했다.[41]

페르디난도 1세는 콜래터럴 위원회, 레지아 카메라 델라 소마리아 등의 새로운 정치, 재정 기구를 통해 현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4] 폰타노, 파노르미타 등 뛰어난 인텔리들을 등용하여 나폴리 왕국을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만들었다.[4]

페르디난도 1세는 카스텔 누오보의 건설과 장식을 거의 전적으로 이탈리아 출신 장인들에게 맡겼다. 특히 라우라나와 함께 1465년에 돌아온 피에트로 다 밀라노는 개선문을 완성하고 왕족의 흉상을 만들었다. 카스텔 누오보의 청동 문인 라 비토리오사는 기욤 델로 모나코의 작품으로, 남작들의 음모에 대한 국왕의 승리를 나타낸다. 문에는 남작들의 음모와 관련된 여섯 개의 그림이 저부조로 표현되어 있다.[12]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어를 왕국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고, 궁정에서 교양과 대중 전통이 융합된 시를 장려했다.[62] 또한 비단 직조술, 1480년의 양모 가공술,[14][81] 금세공술 등 다양한 예술을 장려하고 도입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음악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부르고뉴 악파에서 교육받은 가수들을 지속적으로 찾았으며, 요하네스 틴크토리스를 궁정 예배당에 영입하여 세속 다성 음악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틴크토리스는 왕을 위해 금양모피 기사단 조항의 이탈리아어 번역본을 작성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62] 또한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에 이탈리아 최초이자 유럽 최초의 음악 학교 중 하나를 설립하여 베른하르트 히카르트, 틴크토리스, 기욤 가르니에, 프란치노 가푸리오 등 당대 주요 음악가들을 참여시켰다. 이 학교는 나폴리 음악 학교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9][80]

페르디난도 1세는 외교에 많은 비용을 쏟았고, 재정을 강화하기 위해 궁정과 국가 기구에 긴축 정책을 도입했다.[5] 그는 동서 양쪽으로 상업 교통을 개방하고,[12] 베니스, 피사, 스페인과의 교역을 증진했으며, 상업과 상인을 장려했다. 또한 알함브라 칙령으로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의 이민을 허용하여 나폴리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다.[5] 그는 브린디시, 카푸아, 키에티, 술모나, 라퀼라 등에 화폐 주조 특권을 부여하기도 했다.[12]

5. 1. 건축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 성벽을 처음으로 확장했으며, 1499년에 두 번째 확장이 이루어졌다. 나폴리의 아라곤 성벽은 그의 통치 아래 1484년 6월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를 동쪽으로 성벽을 둘러쌌고, 조반나 2세가 세운 성벽을 더 크게 축소했다. 1488년 6월 15일, 그는 카르멜 수도원 뒤에 첫 번째 돌을 놓았고, 그곳에는 건설자의 이름을 딴 토레 스피넬리라는 탑이 세워졌다. 성벽은 산 조반니 인 카르보나라 수도원까지 이어졌고, 이 작업은 건축가 카를로 마야노에게 맡겨졌다. 1476년, 그는 세관을 항구 근처로 옮기면서 무기고를 왕궁 성벽 아래로 옮기도록 명령했다.[12]

15세기의 가장 위대한 방어 건축물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이 성벽은 1480년 오스만 제국의 오트란토 점령 이후 수도 방어를 강화할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새로운 구조는 스페론의 두라조 성에서 시작되었으며, 브라바 탑과 토레 일 트로노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수도의 동쪽을 경계로 하는 새로운 요새는 약 2km 길이였으며, 20개의 원통형 탑, 4개의 문을 포함했다. 커튼 부분의 두께는 최대 7미터였으며, 노란색 응회암 블록으로 구성되었다. 시골 쪽은 회색 파이페르노 블록으로 덮여 있었다. 각 탑은 포위 공격에 대한 최대의 저항을 제공할 수 있었다. 16세기, 동쪽 성벽은 페드로 톨레도의 지휘 아래 개조되었고, 이는 현대식 바스티온 벽의 건설로 이어졌다. 18세기 중반부터 동쪽 성벽은 통일 이후까지 실질적으로 온전하게 저항했으며, 재건 작업 중에 부분적인 철거를 겪었다.

그의 통치 아래, 카스텔 누오보의 건설이 완료되었고, 그의 아들 알폰소 2세에 의해 포조레알레 궁전[12]이 의뢰되었으며, 현재 필랑기에리 박물관의 본거지인 팔라초 코모(1464년에서 1490년 사이에 건설), 포르타 놀라나, 팔라초 디오메데 카라파(1470), 팔라초 산세베리노의 정면, 현재 제수 누오보 교회(1470), 포르타 카푸아나(페루자의 산 피에트로 문과 함께 르네상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정의됨)[70]이 세워졌다.

페란테의 지시에 따라 세워진 포르타 카푸아나, 1823년 판화


페르디난도 1세는 1465년에 22명의 교직원으로 재개된 나폴리 대학교의 연구를 개혁했고,[14][71] 그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지원했다. 1478년에 그는 나폴리 대학교가 제공하는 가능성에 대해 매우 확신하여, 그의 신하들이 왕국 밖에서 공부하거나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것을 금지했다. 교사들도 왕국으로 모집되었고, 임명된 소수의 외국인 중, 피렌체 출신 프란체스코 푸치만이 나폴리 환경이 영원히 머물 만큼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62] 페르디난도 1세는 배운 교수들을 통해 대학이 번창하도록 관리했다. 그는 코스탄티노 라스카리스를 초대하여 그리스어를 가르치게 하고, 큰 봉급을 할당했다.[12] 페르디난도 1세는 *De scolaribus doctorandis*라는 실용적인 명령으로, 그의 신하들에게 수도에서 과학을 장려하도록 명령했고, 라퀼라에 스튜디오를 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기를 원했다.[25][58]

1486년, 페르디난도 1세는 건축가이자 군사 기술자 프란체스코 디 조르지오 마르티니에게 비잔틴인들이 건설한 타란토 요새를 확장하도록 의뢰했다. 새로운 요새는 7개의 탑을 포함해야 했으며, 그 중 4개는 사변형을 형성하기 위해 연결되었고, 나머지 3개는 마르 피콜로까지 참호를 따라 정렬되었다. 4개의 탑은 각각 산 크리스토팔로, 산 로렌초, 반데라, 베르지네 안눈지아타에게 헌정되었다.

이렇게 도시의 아라곤 성이 탄생했고, 1491년에는 토레 델라 반데라와 산 크리스토팔로 탑 사이의 삼각 모양의 라벨린이 대해를 향한 측면에 추가되었다. 성은 1492년에 완성되었으며, "포르타 파테르나"의 벽에 새겨진 플라크와 앙주 가문의 삼분할된 아라곤 문장이 새겨져 있다.

''"Ferdinandus Rex Divi Alphonsi Filius Divi Ferdinandi Nepos Aragonius Arcem Ha(n)c Vetustate Collabente(m) Ad Im(pe)tus Tormentorum Substine(n)dos Quae (Ni)mio Feruntur Spiritu In Ampliorem Firmioremq(ue) Formam Restituit Millesimo CCCCLXXXXII"''.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왕, 신성한 알폰소의 아들이자 신성한 페르디난드의 손자는, 낡음으로 인해 이 성을 더 크고 튼튼한 형태로 재건하여, 최대의 활력으로 견딜 수 있는 총알의 추진력을 견딜 수 있도록 - 1492년."

페란테의 지시에 따라 건설된 타란토의 아라곤 성

5. 2. 학문 장려

페란테는 평화를 유지하며 부왕 알폰소 5세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는 왕국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예술로 풍요롭게 했으며,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또한, 그의 궁정에 문인들과 다양한 분야의 학자, 특히 민법 및 교회법 교수들을 초빙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가의 융성 외에도 문학과 작가들이 번성했다. 이 시기 나폴리는 예술 진흥과 궁전을 장식한 많은 왕족들로 인해 앙주가의 카를로 2세 시대와 유사한 번영의 황금기를 맞이했다.[14][37]

1470년, 페란테는 브뤼셀의 아르놀드, 식스투스 리싱거, 요도코 하벤슈타인을 고용하여 이탈리아에 인쇄기를 처음으로 도입했다.[14] 나폴리에서 인쇄된 책들 중에는 라틴 고전, 안토니오 다르산드로의 법전 주석, 안젤로 카토네 다 수피노의 의학 서적, 철학 강의, 아니엘로 아르카모네의 왕국 헌법 저서, 어부들과 이탈리아 영웅들의 시 등이 있었다.[12] 그의 절친한 친구인 피에트로 수몬테가 인쇄한 사나자로의 아르카디아도 나폴리에서 인쇄되었다.[14][39] 1478년 리싱거가 로마로 돌아가자, 프란체스코 델 투포가 인쇄소 감독을 맡았으며 15세기 나폴리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인쇄한 인쇄업자가 되었다.[40]

페란테는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간청과 그의 청렴함에 대한 명성으로 인해 수도승 프란치스코를 파올라에서 오게 했다. 경건한 종교인은 1481년 나폴리에 도착하여 왕으로부터 큰 존경과 예우를 받았다.[41]

페란테는 기독교 생활을 전파하는 프란치스코를 통해 자신의 청렴함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성인을 현재 플레비시토 광장 지역으로 데려가 미니미 수도원을 나폴리에 건설하기 위해 제공된 금화가 가득한 쟁반으로 유혹했지만, 성 프란치스코는 거절하고 동전 하나를 꺼내 부러뜨려 피를 흘리게 했다. 동전에서 나온 피는 권력자에게 고통받는 백성들의 피였다.[41]

페란테는 콜래터럴 위원회와 같은 새로운 정치 기구와 레지아 카메라 델라 소마리아와 같은 재정 구조를 강화하여 현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4]

폰타노, 파노르미타 등과 같은 인텔리들이 있는 나폴리 왕국은 문화적 매력과 승진을 위한 정책 덕분에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에서 주연으로 참여하게 되었다.[4]

그는 나폴리 성벽의 첫 번째 확장을 담당했으며, 1499년에 두 번째 확장이 뒤따랐다. 페란테는 나폴리를 동쪽으로 성벽으로 둘러쌌다.[12]

그의 통치하에, 카스텔 누오보 건설이 완료되었고, 그의 아들 알폰소에 의해 포지오레알레의 웅장한 궁전[12], 현재 필랑기에리 박물관의 본거지인 아름다운 팔라초 코모(1464년에서 1490년 사이에 건설), 포르타 놀라나, 팔라초 디오메데 카라파(1470), 팔라초 산세베리노의 정면, 현재 제수 누오보 교회(1470), 포르타 카푸아나(페루자의 산 피에트로 문과 함께 르네상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정의됨)[70]이 세워졌다.

돈 페란테는 1465년에 22명의 교직원으로 재개된 나폴리 대학교의 연구를 개혁했고,[14][71] 그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지원했다. 1478년에 그는 나폴리 대학교가 제공하는 가능성에 대해 매우 확신하여, 그의 신하들이 왕국 밖에서 공부하거나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것을 금지했다.[62] 또한, 페란테는 코스탄티노 라스카리스를 초대하여 그리스어를 가르치게 했다.[12] 페란테는 De scolaribus doctorandis라는 실용적인 명령으로, 그의 신하들에게 수도에서 과학을 장려하도록 명령했고, 아퀼라시에 스튜디오를 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25][58]

페란테는 후원을 통해 르네상스 문화와 예술을 장려했으며, 수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을 주변에 두었다. 파노르미타는 국왕의 두 번째 비서이자 의회 의장이었다. 일 폰타노는 나폴리 아카데미(유럽 최초의 아카데미 중 하나, 나폴리 왕국의 최초이자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아카데미)[14][71]의 회장이었으며,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폰타니아나 아카데미로 명명되었다.

페란테는 카스텔 누오보의 건설과 장식을 거의 전적으로 이탈리아 출신 장인들을 사용하여 완성했다. 페란테의 명령에 따라, 카스텔 누오보의 훌륭한 청동 문인 라 비토리오사는 적의가 제거한 포병을 통해 청동으로 주조되었으며, 남작들의 음모에서 국왕의 승리를 나타낸다. 문에는 남작들의 음모의 몇 가지 사건이 저부조로 표현된 여섯 개의 그림이 나타난다.[12]

페란테는 또한 행정 및 법원 재판을 수용하기 위한 거대한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을 건설할 계획이었지만, 결코 건설되지 않았다.[62]

페란테는 카르미네 문과 산 제나로 문을 세웠다.[12]

그의 기독교적 경건함으로 인해 1456년 12월 5일과 30일에 발생한 끔찍한 지진으로 거의 완전히 붕괴되어 수도에서 3만 명의 사망자를 낸 나폴리 대성당이 재건되었다. 그는 많은 나폴리 귀족 가문들이 이 재건에 참여하여 후원 예배당을 갖게 했다. 노벨로 다 산 루카노에게 그는 이전 지진으로 인해 건물의 많은 부분이 파괴된 후, 산 도메니코 마조레 대성당의 재건을 위탁했다.[12]

1486년, 페란테는 건축가이자 군사 기술자 프란체스코 디 조르지오 마르티니에게 비잔틴인들이 건설한 타란토 요새를 확장하도록 의뢰했다.[78] 새로운 요새는 7개의 탑을 포함해야 했으며, 그 중 4개는 사변형을 형성하기 위해 연결되었고, 나머지 3개는 마르 피콜로까지 참호를 따라 정렬되었다. 4개의 탑은 각각 산 크리스토팔로, 산 로렌초, 반데라, 베르지네 안눈지아타에게 헌정되었다. 이렇게 도시의 아라곤 성이 탄생했고, 1492년에 완성되었다.

페란테 아래에서, 알폰소가 카스텔 카푸아노에 설립한 매우 부유한 왕립 도서관은 놀라운 속도로 계속 성장했다.[62]

나폴리어를 왕국의 공식 언어로 사용함으로써, 궁정에서는 교양과 대중 전통이 융합된 시의 유행을 장려했다.[62]

페란테가 진정한 열정을 보였던 예술은 음악이었다. 그는 부르고뉴 학교에서 교육받은 가수를 지속적으로 찾았다. "시칠리아 왕의 채플린이자 음악가"로 자신을 정의한 요하네스 틴크토리스는 페란테를 섬기는 데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틴크토리스는 궁정에서 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62]

또한, 페란테는 이탈리아 최초이자 유럽 최초의 음악 학교 중 하나인 나폴리에 설립했으며, 여기에는 당시의 주요 음악가들이 참여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 음악 논문의 작품이 있었다. 페란테가 설립한 이 학교는 이탈리아의 음악 발전에 매우 중요했으며, 나폴리 음악 학교의 기초를 결정했다.[79][80]

그의 외교는 매우 비쌌고, 재정을 강화하기 위해 페란테는 궁정과 국가 기구에 긴축 정권을 도입했고,[5] 그의 봉신들을 위해 상업 교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동서 양쪽에서 상업 교통을 열었다.[12] 또한 상인을 장려했으며, 가톨릭 왕들이 발행한 알함브라 칙령을 통해 스페인에서 추방된 수많은 유대인들의 이민을 허용했다. 난민 중 한 명인 돈 이삭 아브라바넬은 페란테의 나폴리 궁정에서 직위를 받았다. 전반적으로 나폴리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으며, 도시 성벽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5]

브린디시에 부여된 많은 은혜와 광범위한 특권 중, 그는 또한 그에게 보여준 충성심에 대한 대가로 화폐 주조 특권을 부여했으며, 카푸아, 키에티, 술모나 및 라퀼라에도 특권을 부여했다. 그는 후자에게 나폴리 조폐국과 다르지 않은 동전을 치도록 명령했다.[12]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나폴리 왕가는 페란테가 비단 직조술, 1480년의 양모 가공술,[14][81] 금세공술, 금색 커튼과 브로케이드 직조술과 같은 많은 예술을 증가시키고 도입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화려함 면에서 유럽 주요 군주들의 궁정을 부러워할 것이 없었다.

5. 3. 예술 후원

페르디난도 1세는 예술 후원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나폴리 왕국의 문화적 매력을 높이고,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4]

그는 나폴리 성벽을 처음으로 확장했으며, 1484년 6월에 시작된 아라곤 성벽 건설을 통해 나폴리를 동쪽으로 둘러쌌다.[12] 1488년 6월 15일에는 카르멜 수도원 뒤에 첫 번째 돌을 놓았고, 토레 스피넬리라는 탑이 세워졌다.[12] 15세기의 가장 위대한 방어 건축물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이 성벽은 오스만 제국의 오트란토 점령(1480년) 이후 수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건설되었다.[12] 새로운 구조는 스페론의 두라조 성에서 시작되었으며, 브라바 탑과 토레 일 트로노가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약 2km 길이의 요새에는 20개의 원통형 탑과 4개의 문이 있었고, 커튼 부분의 두께는 최대 7미터에 달했다.[12]

페르디난도 1세는 카스텔 누오보 건설을 완료하고, 그의 아들 알폰소는 포지오레알레 궁전을 의뢰했다.[12] 또한 팔라초 코모(1464년~1490년), 포르타 놀라나, 팔라초 디오메데 카라파(1470), 제수 누오보 교회(1470)의 정면, 포르타 카푸아나 등이 그의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다.[70]

1465년,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 대학교를 개혁하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인문학 학습 과정을 추가했다.[14][71] 1478년에는 왕국 밖에서 공부하거나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것을 금지하고, 코스탄티노 라스카리스를 초빙하여 그리스어를 가르치게 했다.[12] 그는 아퀼라에 스튜디오를 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했다.[25][58]

페르디난도 1세는 피코 델라 미란돌라, 마르실리오 피치노, 조반니 폰타노, 안토니오 베카델리 등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을 후원했다. 폰타노는 폰타니아나 아카데미 회장이었으며, 그의 제자로는 야코포 산나차로, 안토니오 플라미니오 등이 있었다.

카스텔 누오보의 청동 문인 라 비토리오사는 남작들의 음모에서 페르디난도 1세의 승리를 나타내며, 기욤 델로 모나코의 작품이다.[62] 문에는 남작들의 음모 사건을 묘사한 여섯 개의 그림이 저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음악에도 큰 열정을 보였다. 그는 부르고뉴 악파에서 교육받은 가수를 찾고, 요하네스 틴크토리스를 궁정 예배당에 영입하여 세속 다성 음악의 전통을 발전시켰다.[62] 틴크토리스는 금양모피 기사단 조항의 이탈리아어 번역본을 작성하기도 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에 유럽 최초의 음악 학교 중 하나를 설립했으며, 베른하르트 히카르트, 틴크토리스, 기욤 가르니에, 프란치노 가푸리오 등이 참여했다.[79][80]

페르디난도 1세는 1456년 지진으로 파괴된 나폴리 대성당 재건에 힘썼으며,[12] 산 도메니코 마조레 대성당 재건도 위탁했다.[12] 1486년에는 프란체스코 디 조르지오 마르티니에게 타란토 요새 확장을 의뢰하여 타란토 아라곤성을 건설했다.[78]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어를 왕국의 공식 언어로 사용하고, 궁정에서 교양과 대중 전통이 융합된 시를 장려했다.[62] 그는 비단 직조술, 양모 가공술(1480년),[14][81] 금세공술 등 다양한 예술을 장려하고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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