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도 1세 (나폴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페르디난도 1세는 1424년 발렌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사생아였으나 아버지 알폰소 5세에 의해 나폴리로 불려 칼라브리아 공작을 거쳐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1458년 즉위 후, 비아나 공작 카를로스의 왕위 계승 시도, 교황 칼릭스토 3세의 견제, 남작들의 반란 등 여러 위협에 직면했으나 밀라노 공국 등의 지원을 받아 통치를 유지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평화를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오스만 제국의 침입에 맞서 오트란토를 탈환하는 등 뛰어난 정치적,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르네상스 문화를 장려하고 건축, 예술, 학문을 후원했으며, 1494년 사망할 때까지 나폴리 왕국을 통치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58년 출생 - 김전
김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훈구파의 중진으로 활동하며 기묘사화에 가담하여 사림 세력을 숙청하는 데 협력한 인물이다. - 1458년 출생 - 아마고 쓰네히사
아마고 쓰네히사는 센고쿠 시대 이즈모국의 슈고다이 아마고 씨 당주로, 교고쿠 씨 가신에서 시작하여 세력을 확장, 이즈모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넓히려 혼인 정책을 펼쳤으나, 후일 가문 내 내분으로 이어졌다. - 칼라브리아 공작 - 루이 2세 당주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아들인 루이 2세 당주는 앙주 가문의 유산을 상속받아 프로방스 백작이 되었고 나폴리 왕국 계승권을 주장하며 경쟁했으나 왕위 획득에는 실패했으며, 엑상프로방스에 대학교를 설립하고 프랑스 궁정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 칼라브리아 공작 - 르네 2세 드 로렌 공작
르네 2세 드 로렌 공작은 1473년 로렌 공작이 되어 낭시 전투에서 승리하여 부르고뉴 전쟁을 종식시켰으며, 보데몽 백작과 바르 공작 작위를 상속받고 가문을 번성시킨 인물이다. - 1494년 사망 - 안젤로 폴리치아노
안젤로 폴리치아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학자이자 시인으로, 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았으며 고전 문헌 연구에 문헌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학계에 영향을 미쳤고, 다양한 라틴어 및 이탈리아어 작품을 남겼다. - 1494년 사망 - 성종 (조선)
성종은 조선의 제9대 국왕으로, 세조의 손자이자 덕종의 아들이며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쳐 친정 후 홍문관 설치, 경국대전 반포 등 조선의 통치 체제 확립과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폐비 윤씨 사사 사건과 서얼 차별 강화는 비판받기도 한다.
페르디난도 1세 (나폴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나폴리 국왕 |
재위 기간 | 1458년 6월 27일 – 1494년 1월 25일 |
대관식 | 1458년 8월 16일 바를레타 대성당, 아풀리아 |
선임자 | 알폰소 1세 |
후임자 | 알폰소 2세 |
왕가 | 트라스타마라 |
아버지 | 알폰소 5세 |
어머니 | 지랄도나 카를리노 |
출생일 | 1423년 6월 2일 |
출생지 | 발렌시아, 아라곤 왕국 |
사망일 | 1494년 1월 25일 (향년 70세) |
사망지 | 나폴리, 나폴리 왕국 |
매장지 | 산 도메니코 마조레, 나폴리 |
혼인과 자녀 | |
배우자 | 이사벨라 디 타란토 추아나 다라곤 |
자녀 | 알폰소 2세, 나폴리 국왕 엘레오노라, 바리 및 페라라 공작부인 페데리코, 나폴리 국왕 추기경 조반니 베아트리체, 헝가리 및 보헤미아 왕비 조반나, 나폴리 왕비 페르디난도, 몬탈토 공작 (사생아) |
2. 생애
페르디난도 1세는 1458년 아버지 알폰소 5세의 뒤를 이어 35세의 나이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폴리와 예루살렘의 군주로서 페르디난도 1세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즉위 초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며 나폴리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선언하였다.[96] 다행히 갈리스토 3세가 사망하고, 신임 교황 비오 2세는 그해 페르디난도의 지위를 인정하였다.[96]
1459년, 페르디난도의 통치는 남작들의 반란으로 위협받았다. 반란의 주동자는 타란토 후작이자 페르디난도의 아내 이사벨라 디 타란토의 삼촌인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였다. 반란자들은 앙주 가문의 르네 당주의 아들 장 2세 드 로렌에게 왕위를 제안했고, 장 2세는 제노바 공화국의 도움으로 함대를 빌려 상륙, 노체라를 포함한 일부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베수비오 산 남쪽 사르노 전투에서 장 2세에게 패배하고 20명의 경호원과 함께 겨우 탈출하였다. 교황과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는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전투가 끝난 후였고, 그들도 산파브리아노에서 장 2세의 동맹에게 괴멸되었다.[96]
캄파니아의 대다수 요새들이 항복했음에도, 장 2세는 나폴리로 진군하지 않았고, 페르디난도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는 나폴리를 지키며 서서히 입지를 회복하였다. 이사벨라는 오르시니 가문에게 장 2세를 돕는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를 설득하도록 했다. 교황령, 밀라노 공국, 스칸데르베그는 군대를 보내 1462년 8월 18일 트로이아에서 장의 군대를 격퇴했다. 장의 함대는 1465년 7월 페르디난도와 아라곤의 국왕 후안 2세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다.[97] 1464년에 페르디난도는 일부 남작들의 반발이 남아있음에도, 그의 왕국에 권위를 다시 세웠다.
1463년, 페르디난도의 아내는 삼촌 조반니 안토니오 델 발초 오르시니의 타란토, 레체와 아풀리아의 영지를 상속받아 페르디난도의 권력과 지위가 강화되었다.
1478년, 페르디난도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항하여 교황 식스토 4세와 동맹을 맺었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가 홀로 나폴리로 가 페르디난도와 평화 협상을 성공시켰다.
1480년, 메흐메트 2세 휘하의 오스만 튀르크군이 오트란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지만,[98] 다음 해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알폰소 왕자가 탈환했다. 1482년, 페르디난도는 교황령에 있던 전통적 성기사의 위치를 포기하고, 페라라, 밀라노와 함께 식스토 4세와 그의 동맹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1485년, 페르디난도의 억압적인 정부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는 귀족들의 반란(남작들의 음모)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고, 페르디난도는 많은 귀족들을 사면했지만, 그 뒤에 체포하여 처형했다.
1493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정복을 위한 이탈리아 침입 준비를 하자, 페르디난도는 이탈리아 대공들에게 경고했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 루도비코 스포르차와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페르디난도 1세는 1494년 1월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알폰소 2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2. 1. 어린 시절과 상속
페르디난도는 아라곤의 알폰소 5세와 나폴리 귀족 출신인 게랄도나 카를리노[11]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알폰소 5세는 1442년 나폴리 왕국을 정복한 후, 후계자로서 입지가 약한 페르디난도를 위해 나폴리 왕국 최대 제후인 타란토 공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 델 발초의 조카이자 상속녀인 이사벨 드 클레르몽과 결혼시켜 아들의 지위를 강화했다.1444년, 페르디난도는 코페르티노 백작 트리스탕 드 클레르몽과 타란토의 조반니 안토니오 델 발초 오르시니의 질녀이자 계승자인 카테리나 델 발초 오르시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이사벨라 디 타란토와 혼인했다. 이사벨라는 1406년에서 1414년 사이 나폴리 여왕이었던 마리 덩기엉의 손녀이자 남부 이탈리아 상당한 영지의 계승자였다.
1458년, 아버지 알폰소 5세의 뜻에 따라 35세의 나이로 나폴리와 예루살렘의 군주 페르디난도 1세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며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갈리스토 3세가 사망(1458년 8월)하고, 신임 교황 비오 2세가 페르디난도의 직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1463년, 페르디난도의 아내는 삼촌 조반니 안토니오 델 발초 오르시니의 계승자로서 타란토, 레체와 아풀리아의 영지를 계승했다. 이사벨라는 또한 예루살렘 왕국의 브리엔 소유권자였다.
2. 1. 1. 유년기
페르디난도 1세는 1424년 6월 2일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나폴리 출신의 게랄도나 카를리노였다.[11] 아버지 알폰소 5세는 사생아 아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 그를 나폴리로 불렀다. 1438년 7월 26일, 페란테는 어린 카탈루냐 귀족들의 수행원과 함께 바르셀로나를 출발하여 이탈리아로 향했다. 8월 19일 가에타에 상륙하여 아버지와 재회했다.알폰소는 아들의 지성과 용기를 높이 평가했고, 둘 사이에는 강한 정서적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1438년 9월 9일, 알폰소는 마달로니 벌판에서 페란테를 기사로 임명했다.
나폴리에서 페란테는 발라, 파노르미타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법학은 튜터 파리 드 푸테오가 가르쳤다.[14] 알폰소가 왕국의 ''사크로 레지오 콘실리오''를 설립했을 때 의장직을 맡았다.[12]
1439년 4월, 삼촌 페테르가 사망한 후, 페란테는 왕국의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440년 2월 17일, 알폰소는 페란테를 적자로 인정하고 나폴리 왕위 후계자로 선언했다. 1441년 1월, 베네벤토에서 소환된 왕국 남작들의 의회 승인을 얻었다. 의회는 페란테를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고, 알폰소는 이를 수락했다.[14]
1443년 3월 3일, 알폰소는 페란테에게 칼과 깃발을 주고 공작의 원을 머리에 씌우며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칭하라고 명령했다.[14]

페란테의 계승권은 1443년 7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교황 칙서로 공식화되었고, 1451년 교황 니콜라오 5세에 의해 확인되었다.[13] 1444년, 타란토의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1452년 6월, 알폰소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청으로 피렌체에 전쟁을 선포하고, 페란테에게 기병 6천 명과 보병 2만 명을 이끌게 했다. 페란테는 아브루초를 거쳐 산 갈가노 수도원에 머물렀다. 피렌체는 프랑스 왕 샤를 7세에게 르네 왕에게 나폴리 왕국 재정복을 촉구하도록 했다.
말라리아에 취약한 투물로에서 페란테 군대에 역병이 퍼져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등이 병에 걸렸다. 페란테는 군대를 피틸리아노로 옮겼다.[14]
9월 1일, 페란테는 포이아노 점령 소식을 들었다. 겨울이 오자 토스카나에서의 전쟁은 끝났다.[14] 알폰소는 평화 협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 시에나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1454년 4월 9일, 베네치아와 밀라노 공작 사이에 평화가 선언되었다.[14]
알폰소는 페란테에게 토스카나를 떠나 아브루초로 가라고 명령했고, 왕국 경계에서 지휘관들을 해임했다.[14]
1454년 8월 28일, 페란테는 나폴리에 입성하여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14]
1455년 2월 15일, 도메니코 카프라니카 추기경은 교황의 요청으로 알폰소와 함께 동맹을 협상, 체결했다. 알폰소는 밀라노 공작 및 피렌체와 평화, 우정을 약속했다.[14]
2. 1. 2. 청소년기
페르디난도 1세는 1424년 6월 2일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알폰소 5세는 사생아 아들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1438년 그를 나폴리로 불렀다.[11] 알폰소 5세의 요청에 따라 페르디난도는 어린 카탈루냐 귀족들의 수행원과 함께 바르셀로나를 출발하여 이탈리아로 향했으며, 1438년 8월 19일 가에타에 상륙하여 아버지와 재회했다.알폰소 5세는 아들의 지성과 용기를 높이 평가했고, 둘 사이에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1438년 9월 9일 마달로니 벌판에서 페르디난도를 기사로 임명했다. 나폴리에서 페르디난도는 발라, 파노르미타 등 훌륭한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법학을 가르친 튜터 파리 드 푸테오도 있었다.[14] 1439년 4월, 삼촌 페테르가 사망한 후, 페르디난도는 왕국의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440년 2월 17일, 알폰소 5세는 페르디난도를 적자로 인정하고 나폴리 왕위 후계자로 선언했다. 1441년 1월 베네벤토에서 소환된 왕국 남작들의 의회는 이를 승인했다. 의회는 페르디난도를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고, 알폰소 5세는 이를 수락했다.[14] 1443년 3월 3일, 산 리고로 수녀원에서 페르디난도는 공식적으로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임명되었다.[14]
페르디난도의 계승권은 1443년 7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교황 칙서로 공식화되었고, 1451년 교황 니콜라오 5세에 의해 재확인되었다.[13] 1444년, 페르디난도는 타란토의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1452년 6월, 알폰소 5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청으로 피렌체에 전쟁을 선포하고, 아들 페르디난도를 파견했다. 페르디난도는 아브루초를 거쳐 산 갈가노 수도원에 머물렀다. 피렌체인들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말라리아가 퍼지면서 페르디난도는 군대를 피틸리아노로 옮겨야 했다.[14] 9월 1일, 포이아노 점령 소식을 들었고, 겨울이 오면서 토스카나에서의 전쟁은 끝났다.[14] 알폰소 5세는 평화 협상을 통해 베네치아 공화국, 시에나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알폰소 5세는 페르디난도에게 토스카나를 떠나 아브루초로 가라고 명령했고, 1454년 8월 28일 페르디난도는 나폴리에 입성했다.[14] 1455년 2월 15일, 교황의 요청으로 도메니코 카프라니카 추기경이 나폴리에 와서 동맹을 협상했다. 알폰소 5세는 밀라노 공작 및 피렌체인들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14] 페르디난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458년 35세의 나이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2. 2. 즉위와 통치
페르디난도 1세는 1458년, 아버지 알폰소 5세의 뒤를 이어 35세의 나이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폴리와 예루살렘의 군주로서 페르디난도 1세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즉위 초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며 나폴리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선언하였다.[96] 다행히 갈리스토 3세가 사망하고, 신임 교황 비오 2세는 그해 페르디난도의 지위를 인정하였다.[96]1459년, 페르디난도의 통치는 남작들의 반란으로 위협받았다. 반란의 주동자는 타란토 후작이자 페르디난도의 아내 이사벨라 디 타란토의 삼촌인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였다. 반란자들은 앙주 가문의 르네 당주의 아들 장 2세 드 로렌에게 왕위를 제안했고, 장 2세 드 로렌는 제노바 공화국의 도움으로 함대를 빌려 상륙, 노체라를 포함한 일부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베수비오 산 남쪽 사르노 전투에서 장 2세 드 로렌에게 패배하고 20명의 경호원과 함께 겨우 탈출하였다. 교황과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는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전투가 끝난 후였고, 그들도 산파브리아노에서 장 2세 드 로렌의 동맹에게 괴멸되었다.[96]
캄파니아의 대다수 요새들이 항복했음에도, 장 2세 드 로렌는 나폴리로 진군하지 않았고, 페르디난도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 디 타란토는 나폴리를 지키며 서서히 입지를 회복하였다. 이사벨라 디 타란토는 오르시니 가문에게 장 2세 드 로렌를 돕는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를 설득하도록 했다. 교황령, 밀라노 공국, 스칸데르베그는 군대를 보내 1462년 8월 18일 트로이아에서 장의 군대를 격퇴했다. 장의 함대는 1465년 7월 페르디난도와 아라곤의 국왕 후안 2세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다.[97] 1464년에 페르디난도는 일부 남작들의 반발이 남아있음에도, 그의 왕국에 권위를 다시 세웠다.
1463년, 페르디난도의 아내는 삼촌 조반니 안토니오 델 발초 오르시니의 타란토, 레체와 아풀리아의 영지를 상속받아 페르디난도의 권력과 지위가 강화되었다.
1478년, 페르디난도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항하여 교황 식스토 4세와 동맹을 맺었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가 홀로 나폴리로 가 페르디난도와 평화 협상을 성공시켰다.
1480년, 메흐메트 2세 휘하의 오스만 튀르크군이 오트란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지만,[98] 다음 해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알폰소 왕자가 탈환했다. 1482년, 페르디난도는 교황령에 있던 전통적 성기사의 위치를 포기하고, 페라라, 밀라노와 함께 식스토 4세와 그의 동맹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1485년, 페르디난도의 억압적인 정부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는 귀족들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고, 페르디난도는 많은 귀족들을 사면했지만, 그 뒤에 체포하여 처형했다.
1493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정복을 위한 이탈리아 침입 준비를 하자, 페르디난도는 이탈리아 대공들에게 경고했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 루도비코 스포르차와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2. 2. 1. 정적 숙청
1485년, 페르디난도 1세의 억압적인 정부에 대항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는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에는 프란체스코 코폴라, 살레르노의 안토넬로 산세베리노 등이 연루되었다.[14][47] 코폴라와 안토넬로 페트루치는 카스텔 누오보에서 열린 결혼식 중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5][55]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페르디난도 1세의 사면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귀족들이 그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4][57]페르디난도 1세는 아들 알폰소 공작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고령과 새 신부의 영향으로 정부의 거의 모든 권한을 알폰소에게 넘겼다. 알폰소는 귀족들을 멸시하며 억압하는 것이 백성을 돕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알폰소의 태도와 페르디난도 1세의 중앙 집권적 통치는 1485년에 두 번째 귀족 반란을 야기했다. 귀족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14][47]
이 반란의 주동자는 사르노 백작 프란체스코 코폴라와 왕의 비서 안토넬로 페트루치였다. 이들은 살레르노 공작 안토넬로 산세베리노, 알타무라 공작 피로 델 발조, 비스냐노 공작 등 여러 귀족들과 함께 멜피에 모여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교황은 이를 수락했다.[14][48]
페르디난도 1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비스냐노 공작과 평화 조약을 맺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아무것도 줄 의도가 없었다. 나폴리의 페데리코를 살레르노로 보내 안전을 도모하게 했지만, 살레르노 공작은 페데리코에게 나폴리 왕국을 제안하며 알폰소를 쫓아낼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페데리코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14][49][50]
이에 분노한 페르디난도 1세는 교황에게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하고, 칼라브리아 공작 알폰소를 대규모 군대와 함께 왕국의 국경으로 보냈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베네치아는 중립을 지켰다. 알폰소는 교황령을 침공하여 로마를 포위했고, 페르디난도 1세는 속임수로 귀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14][52][53]
결국 교황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귀족들이 왕과 합의하도록 설득했다. 1486년 8월 12일, 밀라노 대주교 조반니 아르침볼디 등이 참여한 가운데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조건 중 하나는 왕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인정하고, 통상적인 수입과 치네아를 지불하며, 귀족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었다.[14][54]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평화 조약 이후 페르디난도 1세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그의 요청을 모두 만족시켰다.[14][56]
그러나 남작들은 알폰소의 잔혹함과 페르디난도 1세의 불신을 알고 고통받았다. 페르디난도 1세와 알폰소는 반역자 코폴라와 페트루치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사르노 백작 아들과 국왕 조카딸의 결혼 축하 행사 때, 누오보 성에서 이들을 체포하고 고문했다.[25][55] 페르디난도 1세는 또한 프란체스코 코폴라, 페트루치 등 여러 귀족들을 투옥하고 참수형에 처했다. 그들의 재산은 국고에 귀속되었다.[14][57]

이후 페르디난도 1세는 알타무라 공, 비시냐노 공, 멜피 공작 등 많은 귀족들을 투옥하고, 칼라브리아 공작의 자극으로 거의 모두 몰래 죽게 했다. 그러나 세상이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 오랫동안 생필품을 보냈다.[14][57]
이 사건 이후, 각국 군주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알폰소와 페르디난도 1세는 자신들을 변호했지만 소용없었다. 교황은 샤를 8세에게 왕국 침략을 촉구했지만, 페르디난도 1세는 새로운 조약으로 위협을 피했다.[25][58]
2. 2. 2. 영토 확장
페르디난도는 아버지 알폰소 5세의 뜻에 따라 1458년에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고 선언하고 나폴리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삼으려 했다. 갈리스토 3세가 사망한 후, 신임 교황 비오 2세는 페르디난도의 지위를 인정했다.[96]1459년, 페르디난도의 통치는 남작들의 반란으로 위협받았다. 반란의 주동자는 페르디난도의 아내의 삼촌인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였다. 반란자들은 르네의 아들 장 2세 드 로렌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장 2세는 제노바의 도움을 받아 상륙하여 일부 도시들을 점령했다.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사르노 전투에서 장 2세에게 패배하고 20명의 경호원과 함께 겨우 탈출했다. 교황과 밀라노 공작은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들은 장 2세의 동맹에게 격파되었다.[96]
장 2세는 나폴리로 즉시 진군하지 않았고, 페르디난도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는 나폴리를 지키며 입지를 회복했다. 알바니아의 군주 스칸데르베그의 도움으로 1462년 8월 18일 트로이아에서 장의 군대를 격파했다. 장의 함대는 1465년 7월 페르디난도와 아라곤의 국왕 후안 2세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다.[97] 1464년에 페르디난도는 왕국의 권위를 다시 세웠다.
1463년, 페르디난도의 아내는 삼촌 조반니 안토니오 델 발초 오르시니의 타란토, 레체와 아풀리아의 영지를 상속받아 페르디난도의 권력과 지위가 강화되었다.
1480년에 오스만 제국군이 오트란토를 점령했지만,[98] 다음 해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알폰소 왕자가 탈환했다. 1482년, 그는 페라라와 밀라노와 함께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페라라 전쟁)
1485년, 페르디난도의 억압적인 정부는 귀족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았다. 반란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많은 귀족들이 페르디난도에게 사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2. 2. 3. 오스만 제국의 침입
1480년 메흐메트 2세 휘하의 오스만 튀르크군이 오트란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지만,[98] 다음 해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인 칼라브리아 공작 알폰소가 탈환했다.2. 2. 4. 남작들의 음모 진압
페르디난도는 아버지 알폰소 5세의 뜻에 따라 1458년에 왕위를 계승했지만,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며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선언했다.[96] 그러나 교황 비오 2세는 페르디난도의 지위를 인정하였다.[96]1459년, 페르디난도의 통치는 남작들의 반란으로 위협받았다. 반란의 주동자는 페르디난도의 아내의 삼촌인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였다.[96] 반란자들은 장 2세 드 로렌에게 왕위를 제안했고,[96] 장 2세는 함대를 이끌고 상륙하여 일부 도시들을 점령했다.[96]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사르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겨우 탈출했다.[96] 교황 비오 2세와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는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들 역시 패배했다.[96]
장 2세는 나폴리로 진군하지 않았고, 페르디난도는 스칸데르베그의 도움을 받아 1462년 8월 18일 트로이아에서 장의 군대를 격파했다.[97] 장의 함대는 1465년 7월 페르디난도와 아라곤의 국왕 후안 2세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다.[97] 1464년에 페르디난도는 왕국의 권위를 다시 세웠다.[97]
1485년에 페르디난도의 억압적인 정부는 귀족 반란을 일으켰다.[97] 이 반란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는 프란체스코 코폴라(Francesco Coppola), 안토넬로 산세베리노 등이 연루되었다.[97] 코폴라와 안토넬로 페트루치는 카스텔 누오보에서 열린 결혼식 중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97] 페르디난도는 많은 귀족을 사면했지만, 그 뒤에 체포하여 처형했다.[97]
2. 2. 5. 외교 관계 강화
페르디난도는 1458년, 35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다며 왕국을 교회의 봉토로 선언하였다. 갈리스토 3세가 사망하고, 신임 교황 비오 2세는 그해 페르디난도의 지위를 인정하였다.[96]1459년, 페르디난도의 통치는 남작들의 반란으로 위협받았다. 반란의 주동자는 타란토 후작이자 페르디난도의 아내의 삼촌인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였다. 반란자들은 르네 당주의 아들 장 2세 드 로렌에게 왕위 계승을 제안했다. 장 2세 드 로렌는 제노바의 도움으로 함대를 빌려 상륙, 노체라를 포함한 일부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사르노 전투에서 장 2세 드 로렌에게 패배하였다. 페르디난도는 20명의 경호원과 함께 겨우 탈출하였다. 교황과 밀라노 공작은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전투가 끝난 후였고, 그들도 산파브리아노에서 장 2세 드 로렌의 동맹에게 괴멸되었다.[96]
캄파니아의 대다수 요새들이 항복했음에도, 장 2세 드 로렌는 나폴리로 진군하지 않았고 페르디난도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는 나폴리를 지키며 서서히 입지를 회복하였다. 이사벨라는 오르시니 가문에게 장 2세 드 로렌를 돕는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를 설득하도록 했다. 교황령, 밀라노, 스칸데르베그는 군대를 보내 1462년 8월 18일 트로이아에서 장의 군대를 격퇴했다. 장의 함대는 1465년 7월 페르디난도와 아라곤의 국왕 후안 2세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다.[97] 1464년, 페르디난도는 왕국 내 권위를 다시 세웠다.
1478년, 페르디난도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항하여 교황 식스토 4세와 동맹을 맺었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가 홀로 나폴리로 가 페르디난도와 평화 협상을 성공시켰다.
1480년, 메흐메트 2세 휘하의 오스만 튀르크군이 오트란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지만,[98] 다음 해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알폰소 왕자가 탈환했다. 1482년, 페르디난도는 교황령에 있던 전통적 성기사의 위치를 포기하고, 페라라, 밀라노와 함께 식스토 4세와 그의 동맹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1485년, 페르디난도의 억압적인 정부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원을 받는 귀족 반란을 일으켰다. 프란체스코 코폴라와 안토넬로 페트루치는 카스텔 누오보에서 열린 결혼식 중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고, 페르디난도는 많은 귀족들을 사면했지만, 그 뒤에 체포하여 처형했다.
1493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정복을 위한 이탈리아 침입 준비를 하자, 페르디난도는 이탈리아 대공들에게 경고했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 루도비코 스포르차와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2. 3. 죽음
1494년 1월 25일, 페르디난도 1세는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알폰소 2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2006년 페르디난도 1세의 미라화된 시신을 조사한 결과, 그의 사망 원인은 대장암으로 밝혀졌다. 시신에서 발견된 탄소 13과 질소 15는 그가 역사적 기록대로 육류를 많이 섭취했음을 보여준다.[99]1493년까지 왕국과 이탈리아에서 신중함으로 평화를 유지했던 페르디난도 1세는 프랑스 왕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왕국을 강화하고 강력한 적에 저항하기 위해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가래와 열병으로 14일간 병을 앓았는데, 이는 나이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 컸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건강과 정신적 명료함을 유지했다. 그의 튼튼하고 근육질의 몸은 노년에 쇠약해졌고, 젊은 시절 짧게 자른 짙은 흑발은 길고 하얗게 변했지만, 심각한 질병은 거의 없었다.[62]
죽기 직전, 그는 자신의 시간이 정말로 왔다고 믿지 않고 턱과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러나 갑자기 정신을 잃고 떨면서 곁에 있던 자녀와 손자들에게 "내 아이들아, 축복을 받아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Deus, propitius esto mihi peccatori|신이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소서la"라고 말하고 즉시 사망했다.[14][63] 그의 사망 원인은 2006년 그의 미라를 검사한 결과 대장암(KRas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있는 점액성 선암종)으로 밝혀졌다. 그의 유해는 상당한 육류 소비에 대한 역사적 보고와 일치하는 탄소 13과 질소 15의 수치를 나타낸다.[64] 이 군주의 죽음에 앞서 거대한 지진이 발생하여 나폴리, 카푸아, 가에타, 아베르사에서 많은 건물들이 붕괴되었다. 그가 묻힌 날, 나폴리 조폐창이 크게 무너졌다고도 한다.
알폰소의 명령으로 거행된 페르디난도 1세의 장례식은 성대했고, 도시의 남작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에게 극진한 예우를 다했다. 두 번의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는데, 하나는 군대가 참석한 가운데 카스텔 누오보에서, 다른 하나는 산 도메니코 마조레 성당에서 열렸다.[12]
그의 방부 처리된 시신은 금색 브로케이드로 덮인 관에 안치되어 산 도메니코 마조레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그의 무덤은 대성당의 성물실에서 볼 수 있다.[14] 그의 심장은 작은 금색 단지에 담겨 "Fernandus senior, qui condidit aurea saecla|황금 시대를 연 페르디난도 원로la. Hic felix Italum vivit in virum hoursla"라는 구절이 새겨졌다.[12]
그의 죽음은 후손과 왕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 불행하고 치명적인 재앙을 가져왔다.[14][63]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알폰소 2세 (나폴리)가 왕위에 올랐고, 그는 곧 자신의 아들 페란디노를 위해 왕위를 포기했는데, 이는 1494년에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침략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3. 페르디난도의 명성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은 페르디난도 1세에 대해 "뛰어난 용기와 정치 능력은 있었지만, 그의 정부 체계는 잔인하고 형편없었다. 재정 관리력은 강압적이고 부정한 독점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적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었다."라고 평가했다.[100]
페르디난도 1세는 자신의 왕국이 가진 중요성 때문에 많은 적을 두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위협이 된다면 무자비하게 다루었으며, 심지어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상대로 음모를 계획하기도 하였다.[100]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페르디난도 1세의 기분에 대해 "사냥과 재산 탕진 외에 두 가지 즐거움이 더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적들을 가까이 두고 싶어했는데, 살아있는 경우에는 견고한 감옥에, 죽은 경우에는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옷을 입혀 전시했다."라고 묘사했다.[95] 누구도 그의 이러한 취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기에, 페르디난도 1세는 손님들에게 자신의 시체 전시실을 보여주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4. 결혼과 자녀
또는 11월 16일